8. 수진구요(서문-제4요)

2022. 10. 24. 09:34수진실/수련정보

수진구요 서문

참됨을 닦는 도는 천하제일의 큰 일이며 또한 천하제일의 어려운 일이라 하겠다. 그것이 지극히 크고도 어렵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천하의 希有한 일이라 한 것이다.

이 일은 조화에 밝고 음양을 통철하며 경서에 뜻을 두어 오래도록 변하지 아니하며 점진적으로 닦아나가는 자가 아니면 능히 행할 수 없다. 후세의 학인들이 이 일을 궁구하지 않는다면 달리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일찍이 도를 배우지 아니하고도 즉시 도를 이루고자 하고 사람의 길을 배우지 아니하고 곧바로 신선이 되고자 하니 도를 닦는다는 자들이 소의 털과 같이 많은데도 실제 도를 이루는 자는 기린의 뿔과 같이 적음이 조금도 괴이함이 없다 할 것이다.

내 어려서부터 도를 사모하였으나 正人을 만나지 못하여 옳고 그름을 분변하지 못하였다. 이에 마음은 어지럽고 몸은 아쉬워져 거의 해만 입게 되었다.

후에 다행히 스승 감곡노인을 만나 대략의 香風을 얻어듣고 비로소 종전 수행의 허물을 알게 되었으며 또한 천하 도인들의 태반이 모두 그릇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때문에 나는 스승의 뜻을 서술하여 修眞하는 강령을 아홉 가지로 나누고 修眞九要라 명하였다. 그 법이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이끌고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게 하니 초학자들을 위하여 차례대로 단계를 마련한 것이다.

도를 배우는 자(學道)나 닦는 자(修道)를 막론하고 이 구요를 의지하여 순서대로 닦아가면 마침내는 반드시 자득하게 될 것이다.

또한 능히 눈 먼 스승(盲師)과 눈밝은 스승(明師)을 식별하고 正道와 邪道를 분별할 수 있게 되며 능히 천하에서 희유한 일을 행하지는 못할지라도 이 세상에 이런 희귀한 大事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니 부질없이 세월만 보내고 일생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이다.

大淸 가경 삼년 戊午年 9월 9일

서운산 소백산인 오원자 유일명이 自在窩中에서 敍하노라.

수진구요 제 1요

棲雲山 素樸散人 悟元子 劉一明 著 門人 張陽全 後學

勘破世事 第一要

오호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 것이 꿈 같고 환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나니 백년 세월이 순식간일 뿐이니 무상하기 짝이 없다. 비록 금광과 銀山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팔아서 性命을 살 수는 없을 것이며 효자 현손이 있다 하나 질병과 걱정을 덜 수는 없는 것이다.

만약 서둘러 수련하여 닦지 않는다면 임종할 때에 손은 바쁘고 발은 어지러워 허둥댐을 면할 수 없다. 염왕과 노자는 情에 머물기를 좋아하지 않으니 한번 사람의 몸을 잃으면 한없는 세월을 다시 태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도에 뜻을 둔 자 모름지기 입을 굳게 다물고 급히 수련하여야 바야흐로 큰길로 통함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아니한즉 티끌 같은 세상의 인연을 끊지 못하고 망녕되이 도를 이루는 환상을 갖게 되니 비록 몸은 이미 출가하였으되 마음은 아직도 出家하지 못한 것이 되어 일거수 일투족이 세상에 있을 때의 공부와 다름이 없고 한번 행하고 그침이 모두 人情을 따라서 움직이므로 도를 이루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도를 듣지도 못하게 되니 어찌 출가를 귀하다 할 것인가?

예로부터 무수한 학인들이 모두 이와 같이 답습하니 도를 배우는 자는 소의 털과 같이 많으나 도를 이루는 자는 기린의 뿔과 같이 적다.

오진편에 이르기를 금을 쌓기를 산같이 하였더라도 때맞춰 장사꾼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하였고 了道歌에 이르기를 먼저 세상일을 가지고 가지런히 하고 초탈한 후에 道理를 잡고 세밀히 정을 연마하였으니 이 말은 세상일은 모두 거짓이고 性命이 최고로 진실하다는 뜻이다.

그 참됨을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 거짓됨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한번 그 거짓된 것을 인식하게 되면 마음이 거짓 현상을 따르게 되어 모든 것이 거짓 되게 일어나게 되니 도와는 날로 거리가 멀어진다. 이에 스스로 성명을 아끼는 사람이 되지 못하여 허망한 것에 매달려 실답지 못하니 허송세월만 하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옛날에 여조께서는 한번 꿈으로 인하여 모든 생각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며 마조는 죽음을 깨달음으로써 도를 이룸이 가장 빠르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먼저 세상의 일을 감파한 후에 도를 닦음이 일반인들의 修眞보다 더욱 쉽고 빠르다 할 수 있겠다.

하물며 出家修行은 세상일을 감파한 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루는 것인데 만약 세상일을 버리지 못하고 억지로 출가한다면 有名無實하여 하늘에 오르고자 한 것이 오히려 땅에 떨어진 셈이 되어 결국 모든 것을 패망케 되니 어찌 그릇되이 심기만 허비함이 아니겠는가?

내가 學人에게 바라는 것은 在家나 出家를 논하지 말고 진실로 우리에게 간절한 大事가 무엇인가를 분별하려면 먼저 세상 일을 겪고 깊이 탐구하여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이일 저일을 탐구하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이 허망함을 알게 되어 세상일에 탐착을 끓게 된다.

성명의 일은 진실로 큰 것이니 이를 따라 몸을 추스리고 바깥의 허망한 일을 지워버려야 할 것이며 실지를 몸소 밟고 스승을 찾고 도우를 방문하여 용맹전진하여 도를 위하여 몸을 잊는다면 자연 한결 같은 정성이 하늘에 통하게 되리니 조사가 暗中에서 이끌고 진인의 인도함이 있게 될 것이다.

수진구요 제 2요

積德修行 第二要

오진편에 이르기를 만약 수행에 陰德을 쌓음이 없다면 動함에 여러 마구니들의 훼방이 있게 되니 가히 수행함에 덕을 쌓음이 修道者의 중요한 일이 됨을 알아야 한다.

만일 덕을 떠나서 따로 道를 말한다면 이는 이단의 사설이나 방문 외도가 되는 것이니 실제와는 차이가 많다. 그러므로 옛 성인들은 반드시 먼저 道를 밝히었고 옛 현인들은 반드시 먼저 덕을 쌓았다.

도를 밝히지 아니하고도 능히 성인을 이룬 사람은 있지 아니하며 덕을 쌓지 아니하고도 능히 현인이 된 자도 없었다. 그러므로 성인이 되기를 바란다면 반드시 먼저 현인이 되어야 하고 도를 이루고자 하면 반드시 먼저 덕을 쌓아야 한다. 따라서 도와 덕을 함께 하고 내외가 고르게 되어야 성현의 학업을 얻게 되리라.

 

도는 나를 위한 일이며 덕은 남을 위하는 일이다. 비록 도를 닦음은 끝이 있을지라도 덕을 쌓음에는 끝이 없다.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仙, 佛, 神, 聖께서 도를 이루신 후에도 오히려 반드시 和光同塵하고 積功累行하여 三千功이 가득 차고 八百行이 완전해지기를 기다려 바야흐로 하늘의 조칙을 받는 것이다.

하물며 金丹의 大道는 귀신이 꺼리는 것이어서 大忠大孝한 사람이 아니면 능히 알 수가 없고 大賢大德한 사람이 아니면 감히 함부로 전하여서도 아니된다. 억지로 전하여 노출시키는 것은 귀신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암중에 재앙을 내리고 그 수명을 단축시키니 한갖 이익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

내가 감곡 노인의 선법을 얻고 大公으로서의 뜻을 품고 매양 뜻있는 사람을 보면 문득 이끌어주고 싶어 혹 물어보거나 간략히 한 자락을 보여주었다.

후에 그들을 살펴보니 자만자족하여 능히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날이 갈수록 게을러져 뜻과 기를 다 잃고 탐내고 번뇌함이 보통 사람보다 오히려 더 심하였다. 앞뒤의 몇 사람이 모두 다 이와 같으니 아, 슬프다!

이러한 무리는 반드시 선조의 덕이 없고 스스로의 行마저 쌓음이 없어 처음에는 부지런하나 나중에는 게을러 眞宗을 만회하지 못함이니라. 내가 조심하지 않음으로 인하여 실언하여 사람들을 그릇되게 하였으니 또한 여러차례 마장을 만났으나 크게 엃혀 들지 않아서 보배로움을 잃지 않은 것은 아주 다행한 일이라 하겠으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느껴지는 바가 많았다.

그 후부터는 입을 굳게 닫고 함부로 법을 노출시키지 않았으니 이는 반드시 자질과 덕을 갖춘 자를 기다려 법을 전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의 學人들은 門戶에 들기만 하면 곧 신선이 쉽게 되는 줄로 생각하여 동네방네 다 속이고 다니면서 삼갈 줄을 알지 못한다. 또한 한 올의 실과 한 톨의 쌀이 모두 온 세상 사람들의 피와 땀이며 한번 마시고 한번 먹는 것이 모두 중생의 수고로움이란 것을 생각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口頭禪으로 사람들의 인기를 모으고 혹은 거짓 도법으로 사람들의 재물을 모으며 혹은 黃白術로써 속임수를 쓰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계교를 꾸미니 책으로 다 열거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후일 이러한 거짓이 쎃여 가득차게 되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알지 못할 것이다.

옛 사람들이 이르기를 두 뿔이 혹은 있다 하고 혹은 없다 하며 그 끝이 천 갈래 만 갈래로 달라진다 하니 이러한 무리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모름지기 이 도에 뜻을 둔 자는 반드시 덕행을 중히 여기고 스스로 節操를 세워서 진흙탕 같은 곳에서 조그만 이익을 얻고자 다투는 것으로 앞길을 망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무엇을 德이라 하는가?

노인과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구제하고 고아와 과부를 가엾게 여겨 약과 차를 대접하며 다리와 길을 보수하고 위태롭고 곤경에 처한 이를 도우며 의리를 중히 여기고 재물을 가볍게 여기어 널리 방편을 행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行이라 하는가?

자신이 힘들더라도 남을 이익되게 하며 세상의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덕을 베풀되 갚음을 바라지 아니하고 원망이 있으되 원수를 맺지 아니하며 공이 있으되 자랑하지 아니하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옳음을 보면 반드시 하는 것이다.

능히 덕을 쌓고 행실을 세워 오래도록 힘을 다하면 마침내 귀신이 덕에 복종하며 품성이 세속을 초탈하여 당당하게 될 것이니 高人이 한번 봄에 곧바로 점찍어 제자로 삼을 것이니 大道를 가히 바라볼 만하다.

그렇지 아니한즉 한가지 덕과 행실도 쌓지 아니하고 망녕되이 도를 이룰 것을 상상하다가 우연히 高人을 만나게 되면 그 착하지 못함을 숨기고 착한체 하며 스스로 고인을 속였다 자랑하니 이는 남이 자신을 보기를 간과 폐를 환히 꿰뚫듯 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다.

또 다른 본분에 힘쓰지 않는 무리가 있으니 온갖 천박한 일을 다 행하니 아침에는 술집이요, 저녁에는 기생집이라. 입으로는 도덕을 말하나 속마음은 도적이다. 남에게 손해를 입히더라도 자신을 이롭게 하는 데에 천가지 기이함과 백가지 괴이한 일을 다 꾸미고도 스스로 뉘우칠 줄을 알지 못한다. 이에 끝내는 자신을 원망하게 되어 복과 록이 다 없어진다.

단경을 훼손하고 다 미친 말이라 비방하니 참으로 지옥의 種子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단의 무리에 입문하여 사람이 되기를 구하나 끝내 얻지 못할 것이니 어떻게 감히 신선을 바랄 수 있겠는가?

오호라, 덕은 자기가 세상을 사는 일이요, 도는 스승이 전하여 신선을 이루는 일이니 덕을 쌓지 못하고서 도를 닦고자 한다면 사람의 일도 능히 이루지 못함인데 선도를 어찌 이룰 것이가? 재삼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수진구요 제 3요

盡心窮理 第三要

說卦傳에 말하기를 窮理盡性 以至於命(이치를 궁구하여 성을 다함으로써 명에 이르른다)라 하였으니 가히 盡性至命의 學이 모두 이치를 궁구하여 옳고 그름을 定함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치를 궁구함이 투철한즉 성을 능히 온전히 할 수 있으며(性能全) 명을 능히 보전하게 되어(命能保) 곧바로 위 없는 참되고 완전한 곳에 들게 된다.

 

이치를 궁구함이 어지러운즉 명을 닦기 어렵고 성 또한 마치기 어렵게 되어 마침내는 늙음에 이르러 공망에 떨어지는 후회를 하게 된다. 오늘날 학인들이 한때의 기분에 따라 출가하고 흐리멍텅하게 도를 공부하여 수행 또한 갈피를 잡지 못한다. 살아있을 때 이처럼 불분명하니 죽을 때에 어찌 밝고 맑음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명이 얼마만한 일이건대 이처럼 망령되이 행하는가? 金丹의 道는 천지를 감싸는 도이며 천지의 조화를 움켜지는 도이다. 지극히 높고 귀하며 지극히 신비롭고도 묘한 것이니 쉽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학인들이 자기의 성명이 어떤 물건인지도 생각지 아니하고 조사의 법언이 어떤 뜻인지도 분변치 못하고 종일토록 먹고 마시며 마음을 쓰지 않다가 망령되이 한마디, 반 구절의 묘함이 떠오르면 곧 깨치고 도를 이루었다 한다. 낮에는 허랑방탕하고 밤에는 베개를 높이 베고 깊이 잠들며 단경(丹經)은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았다 하고 子書는 허풍이 심하다고 매도한다.

그러고서는 자신에게 도가 있다고 사칭하고 자신의 어긋남으로써 남도 어긋나게 이끌고 망령되이 자신이 진법이라고 착각함으로써 장님이 장님을 이끌게 되니 혹 한둘, 신심 있는 수사가 있다 할지라도 이는 말을 달리며 흘깃 꽃을 봄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깊이 마음을 쓰고 실다운 이치를 궁구할 수 있겠는가? 옛 사람이 이른 말이 있느니 "만약 지면 위에서 참된 뜻을 찾는다면 이는 모두 대라신선의 말이라" 하였으니 이는 특히 스승을 구하지 못하고 분발하는 자들을 위한 말이며 단경과 자서가 쓸데 없다는 뜻이 아니다.

후인들이 옛 사람의 뜻을 알지 못하고 이 구절을 구실로 경서를 돌보지 않으니 크게 어긋난 일이다. 무릇 仙眞의 法言은 한 글자 한 뜻이라도 감히 함부로 쓰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한 구절마다 모두 묘한 뜻이 감추어져 있다.

다만 다소의 노파심으로 후인을 위하여 계단을 만들고 교문을 세워 놓은 마음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헐뜻고 비방하니 그 죄를 어찌 말로 다 할 수가 있으랴?

뒤의 高人과 현인들이 행하는 바를 보면 모두 고인들이 말한 범주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옛사람들이 후세의 사람들을 잘못되게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는 뜻있는 선비에게 권하노니 古人의 法言을 취하여 세밀히 궁구하라.

만일 그 가운데에서 스승의 한 묘결을 얻어 앞뒤를 다 통달하여 일점의 의혹이 없이 한다면 능히 그것을 얻어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 자신의 총명함만을 믿고서 마치 자신 외에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지 말 것이며 삿된 소리를 듣고서 함부로 남에게 가서 자신을 그르치지 말라.

문자에 통하지 못한 학인이라도 일상 생활 속에 상용되는 말들을 깊이 변별한다면 그 속에 大道가 감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말들을 살펴보면 체면을 잊는다, 사람의 형상이 없어진다, 도를 궁구한다, 자재함을 좋아한다, 세 번 구르고 네 번 엎어진다, 방정함을 따라 원만함으로 나아간다, 기틀을 따라 변화에 응한다, 모래 속에서 금을 일어낸다, 無 가은데에서 有를 生한다,

일곱 번 죽고 여덟 번 산다, 나만 있고 남은 없다, 죽고 사는 것을 알지 못한다, 性命을 보지(觀) 못한다, 三家를 두루 달리는 것이 一家를 지킴만 못하다, 남에게 겸손하면 반드시 얻음이 있다, 다만 그 하나만을 알고 둘을 알지 못한다.

이상의 말들은 천기가 크게 노출되어 있는 것이니 어찌 한두가지 일을 쓸데 없다고 버릴 수 있겠는가? 깨달음의 실마리로 삼아서 아침 저녁으로 생각한다면 큰 이치에는 밝지 못할지라도 지식이 점점 열려 도와 서로 가깝게 될 것이니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는 않게 될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궁구하여 배워나가는 것은 어리석음과 현명함을 논하지 않고 사람마다 지어가는 것이니 능히 공부를 거르지 않고 오래도록 해나간다면 스스로 깨달음이 있게 된다. 다만 그 깨달음이란 것이 그 개인의 私見이므로 함부로 下手하여서는 안된다.

진실로 밝은 스승을 만나 반드시 시작과 마침을 철저히 하고 그 가닥가닥을 명백히 추구하여 진실로 확연히 보는 것처럼 알아서 마음으로 얻고 적절히 下手하여야 바야흐로 잘못된 일이 아닐 것이다.

만약 앞만 알고 뒤는 모르거나 뒤만 알고 앞을 모르며, 음만 알고 양을 알지 못하거나 양만 알고 음을 모르며 체만 알고 용을 모르거나 용만 알고 체를 모르며, 혹 유위만 알고 무위를 모르거나 무위만 알고 유위를 모르며, 혹 元關은 보되 약이 생기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약이 생김은 알되 늙고 어린 것을 분별하지 못하며, 혹 단을 맺는 것은 보되 단의 복식을 모르거나,

혹 태를 맺음은 알되 脫胎를 알지 못하며 혹 文息으로 삶고 찌는 것은 알되 무식으로 단련함은 모르며, 혹 무식으로 단련함은 알되 文息으로 삶는 것은 알지 못하며, 혹 陽火는 알되 陰符는 모르며, 혹 眞火는 알되 止足을 모르며, 혹 온양은 알되 抽添은 모른다면 털끝만한 오차로 인하여 千里나 잃게 될 것이다.

참됨을 이루지 못함이 이것뿐만이 아니다. 음과 양에는 內外가 있고 오행에도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있다. 성명의 공부는 兩段이니 先後二天이 각기 다르다. 참됨이 있고 거짓됨이 있으니 참된 가운데 거짓도 있고 거짓된 가운데 참됨도 있다.

또한 참된 가운데 참됨이 있고 거짓된 가운데 거짓도 있다. 이러한 등등을 꿰뚫지 못하면 닦아 행하여도 도달하지 못한다. 또한 밝게 분변하지 못하면 지어도 이루지 못한다(修之不成 作不成之).

이로써 여조께서도 세 차례에 걸쳐 환단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후에 최공의 입약경을 얻어서 비로소 공을 이루었다. 자청 또한 야밤에 풍뢰의 근심이 있다가 거듭 닦아서 드디어 일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신선 가운데에서도 우두머리에 해당하지만 이렇게 밝지 못함이 있으면 오히려 뜻밖의 재난을 당함이 있다. 하물며 다른 사람들은 어떠하겠는가? 학인들은 마땅히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수진구요 제 4요

訪求眞師 第四要

古仙이 이르기를 만약 스승이 사람을 가르쳐 알맞게 일러줌이 없다면 天上의 신선이라 할지라도 머무를 곳이 없다 하였고 또 오진편에 이르기를 그대의 총명과 지혜가 두터워 안자와 민자건을 뛰어넘는다 할지라도 참스승을 만나지 못한다면 두각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니 오직 정성이로다.

성명의 마음이여! 반드시 스승의 전수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망령되이 사사로운 견해로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설도광은 頓悟圓通이 스스로 노력하여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으며 후에 향림을 만나 진전을 얻고서야 비로소 대도를 이룰 수 있었다.

상양자도 이미 綠督의 비결을 얻었으나 만족치 아니하고 靑城을 본 후에야 화후를 갖추었다. 장삼봉도 숭산에서 10년을 고련했으나 한가지도 얻음이 없다가 후에 정, 여 두 선인의 가르침을 받고서야 비로소 大事를 알게 되었다.

비록 세간의 작고 얄팍한 기예라도 오히려 스승의 전수함에 힘입거늘 하물며 性命의 大事를 어찌 스승의 가르침 없이 깨닫겠는가?

대개 성명의 도는 음양을 훔치고 천지의 조화를 빼앗았으며 생사를 운전하고 기틀을 조정하여 하늘보다 먼저 하여도 하늘이 어기지 아니하는 도이다. 이 도는 귀신도 능히 헤아릴 수 없으며 시초나 거북이로도 능히 점칠 수 없는 것이니 이를 얻는 자 성인의 반열에 서는 것이요,

곧바로 피안에 오르는 것이니 이는 천하제일의 큰 일이 아닐 수 없으며 천하제일의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진실로 聖師께서 귀에 대고 속삭여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유독 외도방문이 삼천 육백 가지나 되며 丹法 또한 칠십이품이나 되니 오히려 사악한 것이 바름을 해치고 가짜가 진실을 어지럽히니 누가 눈먼 스승이고 누가 밝은 스승인지 심히 분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살피면 이를 판별하는 것 또한 어렵지만은 않으니 무릇 高人이 세상에 나옴에 스스로 命이 범상치 아니하며 홀로 현을 타며 여러 사람과 두루 사귀지 아니하며 세상에 아첨하지 아니하고 무리를 만들지 아니하며 명예를 탐하거나 바르지 못한 재물을 탐하지 아니하며 이익을 꾀하여 사람을 속이거나 괴이한 짓을 하지 아니한다.

한마디 말이라도 세상의 도리에 이익되게 하며 한 번 행하고 한 번 그치는 것이 모두 성인의 가르침에 도움이 되게 하니 탐, 진, 치, 애가 모두 없고 뜻이 나를 굳세게 하여 모든 것을 정화시키고 인품과 절조가 맑고 높아서 사람들이 능히 미치지 못하고 가슴이 열려 거리낄 것 없음을 남들이 흉내낼 수 없다.

또한 간혹 뜻있는 사람을 이끌 때에는 그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천 번 갈고 백 번 꺾이게 하여 백옥에 하나의 티끌도 없이 한 연후에야 즐거이 그 처음과 끝을 가르쳐 주며 법을 전할만한 사람이 아니면 절대로 천기를 경솔히 누설하지 아니한다. 이상 열거한 것이 밝은 스승의 모습들이다.

눈 먼 스승의 경우는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으면서 무언가 갖고 있는 듯이 하며 속이 비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듯이 한다. 자신이 어긋난 것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며 다시 어긋난 길로 사람을 가르친다.

혹 남녀로써 음양을 삼고 경락의 기 덩어리로 서미현주를 삼으며 혹 화톳불로써 외단을 삼고 心腎을 단련함으로써 내단이라 하고 혹 어떤 상을 잡고서 응신이라 하고 子午를 행함으로써 추첨을 한다 하며 록노를 굴리면서 주천한다 하며 완공을 깨닫고서 無爲라 하고 運氣를 有爲라 한다.

혹 모양을 잊음으로써 고요를 닦는다 하며 몸을 움직여 (머리) 기를 내림으로써 退陰符를 행한다 하고 혹 유황을 복용함으로써 進陽火를 한다 하며 오곡을 피함으로써 장수한다고들 한다.

이 밖에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으니 공덕을 말할 수 없고 절개와 지조도 없다. 몸에 납의(검은 승복)를 걸치고도 허리 속에는 돈주머니를 차며 머리에는 의젓하게 잠관을 썼으되 마음 속은 사갈과 같다.

부귀한 것을 보면 마음을 머물되 어렵고 곤란한 때를 당하면 도를 팽개친다.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으면서도 주위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지 아니하며 무슨 일을 할 때에는 다만 돈 있는 곳을 향하여 공부를 쓰고 거동하는 곳 또한 衣食을 헤아려 마음을 쓴다. 인사하는 사람마다 모두 거두어 무리를 삼고 한번 차를 마시고 음식을 대접받음에도 도를 전한다.

이는 모두 성현의 문호를 빌려 스스로와 세상을 속임이며 仙佛의 法言을 훔쳐서 요사하고 괴이함을 짓는 것이니 이는 다만 스스로의 등따시고 배부른 것만 생각함일 것이며 어찌 다른 사람들의 死活에 관심이 있다 할 것인가?

배우는 사람들이 만일 그 사람의 말만을 듣고 그의 행실을 살피지 않는다면 비록 도에 목적이 있다고는 하나 그늘의 그물에 들어 성명을 상해받지 않는 자가 없다.

한번 그들의 말에 현혹되면 가짜를 참된 것으로 알게 되어 고착되어 바꾸기가 어려우니 비록 高眞聖師가 이끌고자 하나 뾰족한 방법이 없게 된다. 천하의 도인들이 이러한 어려움을 만나는 것이 한번이면 족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치황(緇黃 : 중은 검은 옷을 입고 도사는 황관을 쓰는데서 유래)의 무리들이 동서를 달리며 근원도 없는 수많은 공안과 화후로써 사람을 현혹시키니 이들은 다만 口頭三昧로써 사람을 취하여 사람마다 이에 부처요, 신선이다.

시험삼아 도를 묻는 자 천만이나 되나 도를 이루는 자 그 몇이나 있던가? 대저 성현은 항상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仙佛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루는 것이 아니다. 이런 희유함으로 인하여 高人이 되는 것이니 이러한 고인은 일반적인 부류에서 벗어난 것인데 어찌 구두삼매로써 고인이 되겠는가?

당년에 나의 스승께서 몰래 시금석을 주어 사람의 높고 낮은 성품을 가늠한 적이 있었으니 만약 여러 수사들이 酒色財氣의 시험을 만나 능히 흔들리지 않는 자라면 범상한 품성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오진편이나 참동계에서 말하는 구결에 상응하는 자는 곧 明師이니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출처 : 자하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