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태을금화종지(제1장-제5장)

2022. 10. 24. 09:38수진실/수련정보

태을금화종지 太乙金華宗旨 란 ?
 
당唐나라 때의 신선神仙인 여암(呂?; 洞賓·純陽)이 가르친 바들을 기록하여 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금단金丹에 관한 책이다. 주로 수련과정에서 나타나는 빛光을 중심으로 하여, 이론, 방법, 주의점 등을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성공性功을 주로 하고 있으며, 불교의 이론도 상당히 원용하고 있다. 그 판본 문제에 있어서는 아직 학계에서 확정된 선본善本이 없는 형편이다.
 
일반적으로 여암의 가르침을 기록해둔 것이 전진교全眞敎의 맥을 따라 전해 내려오다가 청淸나라 때의 강희(康熙 ; 1662~1722) 시대에 책으로 이루어졌었으나, 원본이 제대로 전해지지 아니하고, 청淸나라 가경(嘉慶 ; 1796~1820) 시대에 시랑侍郞 벼슬을 하던 장원정蔣元庭이 세간에 전해지는 필사본을 얻어서 《도장집요道藏輯要》에 수록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저자 소개
여동빈呂洞濱
 
여동빈은 당말(唐末)경조인(京兆人)으로 이름은 암(巖)이고 자는 동빈(洞賓)이며 호는 순양자(純陽子)이다. 회창년간(會昌年間:841~846)에 세차례나 진사시(進士試)에 낙제했는데 그때 그는 이미 64세의 고령이었다. 실의(失意)한 그는 노구를 이끌고 강호를 유랑하다가 우연히 장안에 있는 술집에 들렀는데 여기서 종리권(鍾離權)이라는 사람을 만나 장수할 수 있는 방술(方術)을 배웠다.
처음에는 종남산(終南山)에 있었는데 후에 종리권이 다시 그를 학령(鶴嶺)으로 데리고 가서 상진비결(上眞秘訣)을 남김없이 전수했다. 이렇게 해서 여동빈은 도를 터득해서 선화(仙化)하였다.
 
후에 중국 팔선(八仙)중의 한 사람으로 처음에는 선도(仙道)에 크게 통하였고 뒤에는 불에 입문하여 역시 불도(佛道)도 통했으므로 여조(呂祖)라고 불리기도 하고, 원대(元代)에 이르러서는 순양연정경화존우제군(純陽演政硬化尊佑帝君)에 봉해지기까지 하였다.
또한 여조는 종리권(雲房道人)으로부터 천우(天祐)연년(904)에 화산(華山)에서 금단(金丹)과 검법(劍法)을 전수 받았다. 11세기경부터 점차 신선의 대표로서 지위를 획득하였으며 전진교(全眞敎)의 시조인 왕중왕에게 비도(秘道)를 전해 준 선인(仙人)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이때부터 그는 전진교의 교조(敎祖)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으며, 영험이 뛰어난 사람으로 알려질 정도로 그에 대한 민중의 신앙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또한 미륵보살이 도교적 전승자(傳承者)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의 모습은 반드시 검을 등에 지고 있는데 이 검은 탐진 애욕을 비롯한 모든 번뇌를 끊는다는 진검(眞劍), 혹은 심검(心劍)이라고 한다.
 
제 1장 하늘의 중심 天心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절로 그러함을 진리 내지는 이치라고 한다. [自然曰道] 진리 [道]는 이름도 없고, 모습도 없이 하나의 본성 [性]일 뿐이요, 사람의 생명 활동을 주재主宰하는 하나의 으뜸된 신 [元神]일 뿐이다.
본성과 명命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빛 [天光]에 의지하여 있는데 하늘의 빛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사람의 두 눈에 의지하여 있다. 옛날부터 선인(仙人)이나 진인(眞人)이라 하는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서로 가르쳐 전하였는데, 하나 [一]를 가르쳐 전하면 하나를 체험을 통하여 얻곤 하였던 것이다.
 
가장 높은 스승이신 태상노군(太上老君)께서 세상에 몸을 나투신 뒤로 동화제군(東華帝君)이 전하여 받고, 다시 차례대로 여조에게 내려와서, 다시 차례대로 전하여져서 남종(南宗)과 북종(北宗)이라는 두 큰 맥으로 이어졌는데, 이에 이르러 사람의 태어나기 이전 상태를 온전히 보존하라고 가르치는 전진(全眞)의 가르침이 극도로 큰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큰 세력을 떨친다는 것은 그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일 뿐, 오히려 그 마음에서 마음으로 남모르게 전해지던 가르침과 깨달음은 날로 희미해져서, 오늘에 이르러서는 내면의 세계에 남은 것이라곤 없을 정도로 끓어 넘쳐서, 사람들은 분수를 모르고 잘난 체만 하는 풍조가 극도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극도에 다다르면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이치인지라, 동진(東晉)때의 허진군(許眞君)의 가르침을 따라서 맑고 밝음을 굳게 지키는 정명교(淨明敎)가 자비로움을 베풀어 사람들을 널리 건지기 위하여, 문자만으로 가르치는 방법을 떠나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주고자 하는 뜻을 특별히 세우고, 높은 소질을 타고난 사람들을 맞이하여 이끌어 주게 되었다.
이를 듣는 사람은 천겁이 지나도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만난 것이요, 이를 전하여 받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한 때에 진리의 모임[法會]을 하는 것이다.
 
어는 경우이든지 허진군의 애쓰심을 우러러보아야 할 것이다. 반드시 사회생활에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잘 지키고,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흔들림이 없이 굳게 서서 확실한 뿌리를 내린 훌륭한 사람이 된 뒤에야, 태어나기 이전의 참다운 세계[眞]를 닦고 본성[性]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외람되게도 스스로 사람들을 건지는 스승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먼저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라는 말의 뜻을 밝혀 낸 뒤에, 다시 자세하게 설명하고자 한다.
 
태을(太乙)이란, 이보다 더 이상의 위는 없다는 말이다. 단(丹)을 가르치는 법들은 모두 유위(有爲)한 것들을 빌어서 무위(無爲)함에 이르고 있는 것들이지, 유위(有爲)를 단번에 뛰어넘고 무위(無爲)에로 곧바로 들어가는 내용을 가지고 있지는 아니하다.
그러나 그 전하고 있는 종요로운 뜻은 본성을 닦고 불리는 일과 그 효과를 곧바로 드러내 놓고 있어서, 첫째 가는 가르침에 속하고 둘째 가는 가르침에 떨어지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 묘하다"[妙]라고 한다.
 
금화(金華)란 말은 곧 빛을 말한다. 빛에는 색이 없으므로 황금 꽃[金華]으로 상징을 삼았는데, 그 꽃[華]이라는 글자의 뜻 가운데에는 보통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하나의 빛이라는 뜻도 들어 있으니, 다름아니라 '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위없고 참된 기'[先天太乙之氣]라는 것이다. 『 입약경(入葯經) 』에서, " 내면의 세계에서 경험하는 물을 고향으로 하는 납(鉛 )은 그 맛이 한가지이다.
"[水鄕鉛, 只一味]라고 말할 때의 납[鉛]이라는 것이 그것인데, 그 납이라는 것은 물을 상징하는 감괘坎卦의 두 음효陰爻 가운데에 있는 양효陽爻에 해당한다.
 
빛을 되돌려 비추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스르는 법[逆法]을 써서, 하늘의 중심[天心]에 초점을 맞추고 계속 쏟아 붓는 것이다.
하늘의 중심[天心]은 해[日]와 달[月]의 가운데에 있는데, 『황정경黃庭經』에서는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 가운데의 사방 한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 힘차게 살아 나오고 있는 참된 기[眞氣]를 다스릴 수 있다"[寸田尺宅, 可治生]라고 말하고 있다.
한 면의 길이가 한 자 정도 되는 집이란 얼굴을 말하는 것이니, 얼굴 위에 있고 사방이 한치 정도 되는 편편한 곳이란 바로 하늘의 중심[天心]이 아니고 어디이겠는가?
 
사방 한치 정도 되는 가운데에는, 약초들이 빽빽하게 널려 자라고 있어서 사람의 발자취가 닿지 아니하였음을 알 수 있는 평탄한 공간이 높다랗게 걸려 있는 아름다운 광경이라든가, 옥황상제玉皇上帝께서 사시는 하늘나라 서울에 세워진 단청 입힌 궁궐이 보기에도 기묘한 모습 같은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나아가서 지극히 텅 비고 지극히 신령한 신神이 끊임없이 모여들고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허중虛中'이라 하고, 불가佛家에서는 '영대靈臺'라 하고, 도가道家에서는 '조토祖土'·‘황정黃庭'·'현관玄關'·'선천규先天竅'라고 한다. 어떻든 하늘의 중심은 마치 사람이 사는 집과 같은 곳인데, 빛이 그곳의 주인 어른이다.
그러므로 빛이 한번 그곳으로 되돌아 비치게 되면, 온몸에 두루 퍼져 있고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던 기氣가 모두 위로 올라오게 된다. 이는 마치 성인聖人이 임금으로 되어서 서울을 정하고 지극한 법칙을 세우면,
 
그를 따르기 위하여 보물과 비단을 들고 조공을 바치는 나라가 수없이 많게 되는 것과 같고, 한 집의 주인이 깔끔하고 밝으면 그에 따른 사람들이 저절로 시키는 일을 잘 받들고 맡은 일을 잘 처리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저 빛을 돌리는 일[回光]만을 하면 될 뿐이다. 위없이 묘한 비결이다[無上妙諦].
 
빛이라는 것은 쉽게 움직이는 것이어서, 한곳에 머물러 있게 하기가 어려운데, 이것을 되돌려 비추어 오랜 기간이 지나면, 이 빛이 모여서 엉기게 된다. 이 빛이 엉겨 모인 것은 곧 저절로 그러하고[自然] 진리 자체로 된 몸[法身]이라는 것이며, 아홉 하늘[九소] 위에 신神이 엉겨 모이게 된 것이다.
『심인경心印經』에서 이른바 "뜻을 고요히 하여 하느님이 있는 곳을 지키노라면, 진리의 태아가 그곳으로 날아올라 가게 된다"[?朝飛昇]는 것이다.
 
그 종요로운 뜻을 행하여 가기 위하여는, 힘들여 찾거나 한발 한발 밀어 올리는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잡됨이 없이 하느님이 있는 이곳[上丹田]에다가 생각을 못박아 두면 될 뿐이다.
『능엄경?嚴經』은 중생들이 본디 마음을 잃고 헤매이므로 일곱 세계에 윤회하게 되는 이치[七趣]를 설명하는 곳에서,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오직 그것만이 있는 순수한 생각은 그 자체로서 날아다니는 능력이 있으니, 반드시 하늘 위에 나게 된다"[純想卽飛, 必生天上]라고 말하였다.
 
이곳에서 말하는 하늘이란, 공기로 이루어진 푸르고 푸른 바깥 세계의 하늘이 아니고, "진리의 몸을 선천팔괘방위先天八卦方位 가운데 건괘乾卦에 해당하는 궁궐에 태어나게 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 건괘乾卦에 해당하는 궁궐이다.
이 상태를 오래도록 지켜 나가면, 저절로 피와 살로 이루어진 몸 바깥에 또다시 어떤 몸이 있게 되는 경지가 이루어진다. 황금 꽃[金華]는 다름아니라 금단金丹이다. 신의 밝음[神明]이 변하여 이루어진 것인데, 여러 스승들이 누구나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가르친 것이다.
 
그 가운데에 들어 있는 묘한 방법의 가르침은, 비록 털끝만큼도 어기지 아니한다고 할지라도 정확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운데, 마치 힘찬 미꾸라지가 손아귀를 빠져나가듯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총명하여야 하고, 또한 반드시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여야 한다. 아주 총명한 사람이 아니면, 이 가르침을 행하여도 얻지를 못하고, 아주 깊이 가라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가르침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얻지를 못한다.
 
제 2장 원신(元神) 식신(識神)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늘과 땅은 사람을 하루살이같이 보고, 큰 진리는 하늘과 땅도 물거품같이 본다. 오직 생명 활동을 주재主宰하는 으뜸된 신[元神]만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본성[眞性]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 그 위에 있다.
그 정精이나 기氣라는 것은 하늘이나 땅을 따라서 썩거나 허물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지만, 생명 활동을 주재하는 으뜸된 신神이 그에 머물러 있게 되면 곧 무극無極이 이루어진다. 하늘을 생기게 하거나 땅을 생기게 하는 것도 모두 이 이치에 말미암는다.
 
 
배우는 사람이 다만 이 으뜸된 신神만을 감싸서 지킬 수 있으면, 음陰과 양陽이 변화하는 굴레를 뛰어넘어서 그 바깥에 태어날 수 있으며, 더 이상 길을 잃고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라는 굴레 속을 윤회하지 아니하여도 된다.
이것이 곧 선禪을 하는 사람들이 몽둥이로 때리거나 크게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가르침을 전할 때에 흔히 쓰는 "본성을 보아야지......"[見性方可]라는 가르침이다. 이른바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는 본래의 모습'[本來面目]이라는 것이다.
 
 
보통사람이 어머니의 태胎에 태어날 때에 그 생명 활동을 주재하는 으뜸된 신元神은 사방 한치 되는 곳[方寸]에 머물러 살게 되고, 의식意識의 신[識神]은 그 아래에 있는 심장心臟에 살게 된다.
아래에 있고 피와 살로 된 심장心臟은 모양이 마치 큰 복숭아 같은데, 허파가 그것을 덮어서 감싸고 있고, 간肝이 옆에서 돕고 있으며, 큰 창자, 작은 창자가 밑에서 떠받치고 있다. 만일 사람이 하루 동안 밥을 먹지 아니하면, 심장心臟에 아주 큰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놀라운 말을 들으면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화나는 일을 들으면 심장이 괴롭고 답답하며, 사망死亡을 보면 슬퍼지고, 아름다움을 보면 눈길을 빼앗긴다. 그러나 머리 위에 있고 하늘의 중심인 사방 한치 되는 곳에야 어찌 아주 미미한 흔들림이라도 있겠는가?
그렇다면 하늘의 중심인 사방 한치 되는 곳은 절대적으로 움직일 줄 모르는 곳이란 말인가? 다시 말하자면, 사방 한치 되는 곳 가운데에 있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뜻[眞意]은 어찌하여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이 움직일 때에는 별달리 묘妙한 일이란 없지만, 별달리 묘한 일이 없는 그것이 또한 가장 묘한 일이기도 하다. 보통사람이 죽을 때에도 이것이 움직이게 되는데, 그것은 정말 별일이 아니다.
가장 묘하다는 것은, 빛이 이미 모여서 엉겨지고 뭉쳐져서 되고, 진리 그 자체인 몸[法身]이 차츰차츰 신령스럽게 통하면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다. 위에 말한 것은 모두가 지금까지 몇천 년이 지나도록 가르쳐 전하여 주지 아니하였던 비밀이다.
 
 
아래에 있는 의식의 신識神이 마치 변방에 있고 세력이 강한 제후의 나라의 사나운 장군과 같아져서, 귀, 눈, 입, 코, 피부 같은 감각기관을 주재하고 있는 임금에 해당하는 심장[天君]을 속이고 그를 외롭게 몰아세워 두고는, 멀리 떨어져서 한 몸의 법도를 잡고 있기를 오래 계속하게 되면, 마침내 보검의 칼끝이 거꾸로 임금에게로 향하는 반역이 일어나게 된다.
 
 
이제 빛을 엉기게 하여 으뜸된 신[元神]이 있는 궁궐[元宮]을 비추면서 지키게 되면, 마치 지혜가 빼어나고 밝은 임금이 위에 있는 것 같고, 두 눈을 통하여 밖으로 나가던 빛이 내면으로 되돌아 들어오게 되면, 마치 왼쪽에 서 있는 문신文臣과 오른쪽에 서 있는 무신武臣이 마음을 다하여 보필하는 것과 같아진다.
안으로 다스림이 엄숙하게 이루어진 뒤에는, 모든 간사한 무리들이 저절로 창끝을 아래로 향하여 내려뜨리고 임금의 명령을 듣지 아니함이 없게 되는 것이다.
 
 
단丹을 이루는 길[丹道]에 있어서는, 정精이라는 수水와 신神이라는 화火와 뜻[意]이라는 토土, 이 세 가지를 위없는 보물로 삼는다. 정精이라는 수水는 무엇인가 하면, 다름아니라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참되고 하나뿐인 기[先天眞一之氣]이다.
신神이라는 화火는 곧 빛이다. 뜻[意]이라는 토土는 곧 가운데 궁궐 속에 있는 하늘의 중심이요, 하늘의 마음[天心]이다. 신神이라는 화火는 작용이 되고, 뜻[意]이라는 토土는 본체가 되고, 정精이라는 수水는 터전이 된다.
 
 
보통사람은 뜻[意]으로 인하여서 몸[身]을 낳는데, 몸이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고 2미터도 채 안 되는 그 모습에 그치지 아니한다. 몸에는 넋[魄]이라는 것이 있는데, 넋은 의식에 붙어서 작용을 하게 되고, 의식은 넋에 힘입어서 생겨난다.
넋은 음陰하고, 의식[識]의 바탕이다. 의식은 끊임이 없으니, 생겨나고 또 생겨나고 한 세대世代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고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며,
 
 
넋의 모습이 바뀌어지거나, 그 넋이 몸담고 있는 그릇이나 그것을 이루게 되는 재료가 변하게 되는 일은 끝나지 아니한다. 오직 얼[魂]이라는 것이 있어서, 신神이 갈무리되어 있는 곳이 된다. 얼은 낮이 되면 두 눈에 깃들어 있다가, 밤이 되면 간(肝)에 가서 머문다.
얼이 두 눈에 깃들이게 되면 눈이 볼 수가 있고, 간肝에 가서 머물면 꿈이 이루어진다. 꿈이라는 것은 신神이 떠돌아다니는 것이다. 위로는 아홉 단계의 하늘[九天]과 아래로는 아홉 층계의 땅[九地]을 눈깜짝할 동안에 모두 다녀오기도 하는데, 깨어나면 그 모든 것이 언제 있었더냐는 듯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마치 깊은 연못 속같이 된다.
 
 
어떤 형태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다름아니라 그 넋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돌리게[回光] 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서 얼[魂]을 불리게 되고, 신神을 보존하게 되면 넋[魄]을 눌러 놓게 되며, 의식[識]을 끊어버리게 된다.
옛 사람들이 세상을 벗어난 방법은, 음陰한 찌꺼기들을 모조리 불로 불려서 잡된 것 하나없이 순수한 양陽으로 이루어진 상태 곧 팔괘八卦 가운데의 건괘乾卦 상태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으며, 넋을 녹여 없애고 얼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었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음陰을 녹여 없애고 넋을 눌러 놓는 방법을 가르킨 것이다. 순수한 양陽만으로 된 상태인 건괘乾卦의 상태로 돌아오는 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빛을 돌리는[回光] 방법만이 있을 따름이다.
빛은 곧 순수한 양陽만으로 이루어진 상태인 건乾이고, 그것을 되돌려 비춘다는 것은 곧 그것을 떠나갔던 상태로부터 되돌아오게 한다는 것이다. 오직 이 방법만을 지키고 있노라면, 저절로 정精이 가득 차게 되고, 신神이라는 화火가 피어 나오게 되고, 뜻[意]이라는 토土가 엉겨서 흩어짐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성스러운 태아[聖胎]가 맺힐 수 있게 된다. 쇠똥구리라는 곤충이 쇠똥을 동글동글 굴리면 그 알맹이 가운데에서 흰 빛이 생겨나는데, 이것은 신神을 그것에 쏟아 부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신神의 작용에 의한 보람[神功]이다.
이와 같이 쇠똥 알맹이 가운데에서도 새로운 것의 조짐을 낳고 그 껍질을 벗어 버릴 수 있거늘, 나에게 있고 참다운 마음이 쉬고 있는 하늘의 가운데[天心]라는 곳에다가 신神을 쏟아 붓는다면, 어찌 또 하나의 새로운 몸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 불가능하기만 하겠는가?
 
 
하나의 신령하고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참된 성[眞性]이 하늘이라고 할 수 있는 진공[乾宮]에 떨어지고 나면, 그것은 곧 얼[魂]과 넋[魄]으로 나누어진다. 얼[魂]은 하늘의 중심[天心]에 있게 되는데 양陽하고 가볍고 맑은 기氣이다.
이것은 텅 비고 고요한 우주의 근원[太極]으로부터 온 것인데, 우주에서 가장 으뜸이며 근원이 되는 창조주[元始]와 같은 모습이다. 넋[魄]은 음陰하고 무겁고 탁한 기氣인데, 모양·모습이 있는 모든 생물의 육체에 붙어 있다. 얼[魂]은 살기를 좋아하고, 넋[魄]은 죽기를 바라는 성질이 있다.
 
 
이 세상의 물질적인 것[色]을 좋아하여 움직이는 모든 기氣는 모두가 넋[魄]이 그렇게 하는 바이다. 다름아니라 의식의 신[識神]인 것이다. 붙어 있던 생물이 죽은 뒤에는 피로 된 음식을 받아 먹는데, 되살아나는 경우에는 음陰한 것들이 음陰한 것에게로 돌아가서 같은 것끼리 뭉치게 되기 때문에 아주 큰 불행이 일어난다.
배우는 사람은 그 정精과 기氣와 신神을 불리는 과정에서 이 음陰한 넋[魄]을 모조리 불태워 없애 버리면, 곧바로 잡된 것 하나없이 순수한 양陽으로 되는 것이다. 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지 아니한 사람은 이 가르침대로 지킨다고 하여도 얻지를 못한다.
 
 
제 3장 회광수중 (回光守中)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말이 어찌하여 나왔는가? 문시진인文始眞人 곧 관윤자關尹子의 『문시진경文始眞經』에서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빛을 돌게 하면, 하늘과 땅의 음陰하거나 양陽한 기氣가 모두 모여서 엉기지 아니함이 없게 된다.
이른바 깔끔하고 세밀하게 깊이 생각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고, 기氣를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도록 순수하게 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려보는 생각[想]을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도록 순수하게 한다는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처음에 이 방법을 행할 때에는 어떤 존재가 있는 가운데에 있으면서도 마치 그것이 없는 듯이 느끼며 행하지만, 그렇게 오래도록 계속하여 보람이 이루어져서 피와 살로 된 보통의 몸 바깥에 또 하나의 어떤 몸이 이루어지는 때가 되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서 그 어떤 존재가 있는 듯이 느껴지는 것이다.
해가 떴다가 지기를 백 번 거듭하는 동안 오로지 이 일만을 하게 되면, 그제야 빛이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와 같이 참답게 된다. 이렇게 된 뒤에야, 그 빛이 신령한 불[神火]이 되고, 바른 생각[正念]을 이루게 된다.
 
 
위와 같이 배우고 닦으면서 해가 떴다가 지기를 백 번 거듭하고 나면, 빛이 저절로 모여들고 그 가운데에서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참으로 양[眞陽]한 어떤 하나의 점이 저절로 갑자기 생겨나오는데, 마치 기장쌀 알맹이 같은 구슬이다.
부부가 서로 합하면 아이가 생겨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마땅히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빛이 돌면 몸 속에 있는 불[火]이 운행을 하는데, 마치 해가 운행을 하여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생기듯, 빛이 되돌려 비추는 곳에 따라서 몸 속의 불[火]이 운행하면서 여러가지 정황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빛의 돌아감이 곧 몸 속의 불[火]이 엮어내는 계절[候]가 되는 것이다. 우주 자연의 운행과 변화 가운데에는 어떤 양陽한 빛이 있어서 그것을 주재主宰하고 있는데,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日]가 된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눈[目]에 해당된다. 신神과 인식능력[識]을 밖으로 달려나가 버리고 흘러나가 버리게 하는 일은 이 양陽한 빛을 병들게 하는데, 그것은 이것이 매우 순하게 변화를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금꽃[金華]를 피우기 위한 길은 모든 것을 거꾸로 거스르는 방법을 쓴다.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은, 한 사람의 몸에 있고 뛰어나고 훌륭한 광채[精華]를 돌린다는 것만이 아니고, 곧바로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를 일으키는 그 선천先天의 참된 기[眞氣]를 돌린다는 말이며, 그때그때 일어나는 헛된 생각을 한때 그친다는 것만이 아니고, 곧바로 천겁 동안이나 돌고 돌 윤회輪廻를 그쳐서 빌붙을 바 없는 공空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숨 한 번 쉬는 동안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거치게 되니, 인간의 시각으로 따져서 일 년이 흐른 것과 같고, 캄캄한 가운데에서 숨 한번 쉬는 동안에 지옥에서부터 하늘 꼭대기까지 두루 돌아오게 되니, 그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를 거치는 기간이 마치 백년 동안이나 걸리는 긴 밤중과 같다.
 
 
보통 사람은 '으앙' 하고 한번 크게 울면서 땅에 떨어진 뒤로 계속해서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는 대로 따라서 살아갈 뿐, 늙기 전에 한 번도 그 변화를 거슬러 보지 아니한다. 그리하여 양陽한 기氣가 줄어들어 없어지고마니, 곧바로 끝없는 밑바닥의 세계[九幽]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능엄경?嚴經』에서는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순수한 생각[想]은 그 자체로서 위로 날아올라 가고, 잡된 것은 그 자체로서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純想卽飛, 純情卽墜]라고 말하였다.
 
 
보통 배우는 사람은 생각[想]은 적고 정情이 많아서 아래로 흘러내리는 길을 따라 가라앉게 마련이다. 오직 진실하고 헛됨이 없는 진리를 깨달으면서 자세히 살피고[諦觀] 숨을 고르고 가늘고 길고 부드럽게 쉬어야만[息靜]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게 되는데, 그러한 것이 바로 거꾸로 거스르는 방법을 쓰는 것이다.
『음부경陰符經』에서는 "그 열쇠가 되는 기틀이 눈[目]에 있다"라고 하였고, 『황제내경黃帝內經』 소문素問에서는 "사람의 몸에 있는 뛰어나고 훌륭한 광채[精華]는 모두가 위에 있는 텅 빈 구멍으로 올라가서 쏟아 부어진다"라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이러한 사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한 구절을 알아듣고 몸으로 얻으면, 오래도록 사는 사람도 이에서 나오고, 굴레를 벗고 뛰어넘어서 높은 세계로 올라가는 사람도 이에서 나온다. 이것은 유儒 불佛 선仙이라는 세 종교의 어느 것에나 통하는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것[工夫]이다. 빛은 몸 속에 있는 것도 아니고, 몸 밖에 있는 것도 아니다.
산과 물과 땅과 해와 달이 모두 이 빛 아닌 것이 없으므로, 오직 몸에만 있는 것이 아니겠으며, 총명함이나 지혜나 간肝에 모든 정신 작용이 운행되고 전환되는 것이 모두 이 빛 아님이 없으므로, 또한 몸 밖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하늘과 땅과 빛은 그대로 이 세계를 천곱의 천곱을 또 천곱한 만큼의 세계[大千]에 가득 퍼져 있으며, 사람의 한 몸 빛도 역시 저절로 한번 빛을 돌리면[回光], 하늘과 땅과 산과 물 모든 것이 모두 도는 것이다.
사람의 빛은 위로 눈[目]에 모여드니, 이것이 바로 사람의 몸에 있어서의 큰 열쇠가 되는 사실이다. 그대들은 이 사실을 깊이 생각하라. 하루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靜坐] 있지 아니하면, 이 빛이 흘러서 돌아다닌다. 어느 곳에서 막아서 그치게 할 것인가?
 
 
만약 한 시각이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靜坐] 있을 수만 있다면, 지나온 전생前生이 만겁 동안에 천 번을 태어났을지라도 이 한 시각으로 완전히 끝내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가르침은 결국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하라[靜]는 것으로 돌아온다.
참으로 보통사람의 생각으로는 미처 이루어 헤아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묘한 진리[妙諦]인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실제로 배우고 익히는 일[工夫]을 처음 시작함에 있어서는,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거친 곳에서부터 세밀한 곳으로 들어간다.
 
 
통틀어서 말하면, 사이사이에 끊어짐이 없이 계속하는 것을 훌륭하다고 하며, 끊임이 없으면 묘한 보람이 저절로 생겨나게 마련이다. 실제로 배우고 익히는 일[工夫]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一]라는 글자에 달려 있다.
다만, 그렇게 한결같이 하나를 지켜 내고 있노라면, 저절로 차가운 느낌도 오고 더운 느낌도 겪게 되는데[冷暖自知], 그러한 경지나 느낌이야 어떻든, 중요한 것은 눈앞에 나타나는 하늘은 텅 비어 있고, 바다는 드넓어져서, 모든 존재나 이치[萬法]가 하나같이 하나같아지고 평등해지느냐[如如]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바라던 바를 얻었다고 할 수가 있다.
 
 
성인聖人에서 성인으로 서로 전하여 내려온 것은 되돌려 비추는 방법[反照] 아닌 것이 없었다. 공자孔子는 "지혜에 이른다"[致知]라고 말하였고, 석가釋迦는 "마음을 살핀다"[觀心]라고 말하였고, 노자老子는 "안으로 살핀다"[內觀]라고 말하였는데, 그 모든 것이 결국 이 방법이었던 것이다.
다만, 되돌려 비춘다[反照]는 용어를 사람마다 말로는 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 실제로 얻지를 못한다면, 이 용어의 뜻을 참으로 알았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되돌린다[反照]는 것은 보통사람으로서 가지고 있으면서 대상對象을 알고 깨닫는 능력[知覺]이 되는 마음 상태로부터 육신의 모습[形]과 그 신神이 아직 드러나기 이전인 사람으로서의 최초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이 여섯 자밖에 안되는 육신 가운데에서 하늘과 땅이 아직 생겨나기 이전의 본바탕을 되찾는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단지 한두 시간 할 일 없이 앉아서 자기만이 무엇인가를 눈여겨보고는, 곧 "되돌려 비추었다"[反照]고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하여서야 어찌 첫머리 시작이 되었던 곳에든 꼭대기 높은 곳에든 이르러 낼 수가 있겠는가?
불교佛敎나 도교道敎의 조사祖師들이 사람들에게 "코끝을 보아라[看鼻尖]"고 가르치는 것은, 생각을 코끝에 매어 두라는 말도 아니고, 눈으로 코끝을 보면서 생각은 또한 단전丹田[中黃]에 쏟아 부으라는 말도 아니다.
 
 
눈길이 이르는 곳에는 마음이 또한 이르고, 마음이 이르는 곳에는 기氣도 또한 이른다. 어찌 하나는 위에 있고 하나는 아래에 있게 할 수가 있으며, 또한 순간적으로 위에 있다가 순간적으로 아래에 있다가 할 수가 있겠는가?
결국 이 말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과 같은 것인데,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 손가락을 달이라고 잘못 알아듣는 것과 같은 사정이다. 그렇다면 결국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코끝'[鼻端]이라는 용어가 가장 그 뜻이 묘하다. 이 용어는 코를 가지고 눈길을 잡는 가늠쇠로 삼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처음 배우고 익히는 사람이 눈길을 코끝 가운데에 두지 아니하고, 눈을 크게 뜨면 먼 곳을 보게 되어 코를 보지 않게 되며, 눈을 너무 감으면 눈꺼풀이 붙어 버려서 역시 코를 보지 않게 된다. 눈을 크게 뜨면 눈빛이 바깥으로 달아나서 잃게 되어, 쉽게 흩어지고 어지러워지며, 너무 감으면 눈빛이 안으로 달아나서 잃게 되며, 쉽게 잠이 들어 어두움 속으로 가라앉게 된다.
오직 발을 내려서 가려 놓은 듯한[垂簾] 상태만이 옳은 방법에 맞는 것인데, 그렇게 하자면 마치 코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듯이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코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써 가늠쇠를 삼은 것이다.
 
 
이 '발을 내려서 가려 놓은 듯함'[垂簾]이란 상태는 마치 햇볕이 자연스럽게 발을 뚫고 들어오는 상태이지, 애써 그것을 내려 쬐게 하거나 내려 쬐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다. 코끝을 본다[看鼻端]는 것은, 제일 처음으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靜]을 배우고 익히고자 하는 경우에, 눈길을 모아서 그곳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가늠쇠로서의 자리가 확실하게 잡히고 나면, 저절로 이루어지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마치 이수泥水에 사는 훌륭한 목수가 줄을 이용하여 일을 하는 것과 같은데, 처음 시작할 때에 한 번 줄을 써서 좌우를 분명하게 갈라 놓고는 끝마칠 때까지 그에 따라서 일을 해 나가는 것이지, 계속해서 줄을 잡고 좌우를 번번히 맞추어 가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치고[止] 비추어 살핀다[觀]"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인데, 원래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뜻을 부어가면서 두 눈으로 코끝을 살피듯이 보며, 몸을 바르게 하여 편안하게 앉아서, 마음을 이끌어다가 연중緣中이라는 곳에다가 매어 두는 것이다. 도가道家에서는 단전丹田 즉 중황中黃이라고 하는 것을 불가佛家에서는 연중緣中이라고 하지만, 결국 같은 하나이다.
그리고 반드시 머리의 가운데에다가 생각을 매어 두어야 한다고 말할 필요는 없고, 다만 두 눈의 가운데로서 편편한 곳인 이른바 선천조규先天祖竅라는 곳에다가 생각[念]을 매어 두면 되는 것이다.
 
 
빛은 살아서 펄펄 뛰는 듯이 힘찬 물건이라서, 생각[念]을 두 눈 사이의 편편한 곳, 즉 조규祖竅에다가 매어 두면, 빛이 저절로 그곳으로 뚫고 들어간다. 반드시 뜻을 머리의 한가운데인 어떤 장소에다가 달라붙어 있게 하지 아니하여도 된다.
이상의 몇 마디 말로써 모든 중요한 방법과 요령을 이미 모두 다 말하여 버렸다. 그 나머지,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靜]에 들어가고, 그로부터 나오는 요령과 그러한 요령에 앞서서 해야 하는 일과 그 뒤에 해야 하는 일들은, 아래의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치고[止] 비추어 살핌[觀]에 대한 짤막한 글을 맞추어 봄으로써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연중緣中이라는 용어의 뜻이 지극히 묘하다. 중中이라는 뜻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이 세계를 천곱에 천곱에 천곱을 한 그 많은 세계가 모두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다.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 자연의 운행 변화의 기틀[造化之機]이 이를 말미암아서 질서있게 제자리를 잡게 된다는 이치를 가르치는 용어인 것이다.
연緣이라는 용어는, 이로 말미암아서 무엇인가 이루어지게 되는 실마리 또는 인연이라는 뜻이며, 확실하게 어느 하나의 사실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중中이라는 용어와 연緣이라는 용어의 뜻은 매우 걷잡을 수 없도록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매우 알아내기 힘드는 것이지만, 깨닫고 보면 참으로 훌륭하게 사용한 용어이다.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친다[止]"는 뜻과 "비추어 살핀다"[觀]는 뜻은, 각각 용어의 뜻은 다르지만, 그에 따라서 배우고 익히는 경우의 실제에 있어서는 본래 따로 떨어져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흩어짐없이 한곳에 머물러서[定] 슬기의 빛으로 조용히 비추고 있는[慧]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이루어진 뒤에는, 어떠한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구태여 지난날처럼 다리를 틀고 오롯이 앉을 필요는 없게 된다.
 
 
마땅히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어떠한 곳에 들어 있는가?", "어디에 가서 사라지는가?" 하는 문제를 붙들고 거듭거듭 끝까지 헤치고 들어가 봐야 하지만, 마침내 그러한 곳을 붙잡아 낼 수는 없고, 다만 그 자체로써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곳을 보게 되는 것이다.
또한 이 생각[念]이라는 것이 일어나는 그곳에 관하여 이러쿵저러쿵 토론할 필요도 없으니, 이른바 마음을 찾는다는 일[覓心]도 깨닫고 보면 본래 그렇게 될 수 없었던 일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나와 너 즉 주관主觀과 객관客觀의 마음이 안정된 상태, 이것이 곧 비추어 살핌을 바르게 하는 일[正觀]이고, 이러한 이치에 어긋나는 것 곧 비추어 살피는 마음과 그 대상이 서로 맞지 아니하는 것을 비추어 살핌을 바르게 하지 못하는 것[邪觀]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태로 되는 일은 그렇게 되고자 노력하여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처음 배우고 익힘을 시작하였던 때의 상태를 그대로 계속해서 끊어짐 없이 이어나가노라면 이루어지는 것이다.
 
 
헛된 생각을 그치고[止], 그것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노라면, 비추어 살피는[觀] 경지가 이루어지고, 비추어 살피는 경지에 이르러서[觀], 그것을 끊임없이 이어나가노라면, 헛된 모든 생각이 그쳐지게[止] 된다. 이러한 이치가 곧 "마음을 흩어짐없이 한곳에 머물러서[定], 슬기의 빛이 조용히 비치게 함[慧]을 함께 닦는다[雙修]"는 가르침이 된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빛을 돌린다"[回光]는 것이 되는데, 돌린다[回]는 것은 헛된 모든 생각을 그친다[止]는 것과 같은 내용이고, 빛[光]이라는 것은 비추어 살핀다[觀]는 것과 같은 내용이다.
 
생각을 그쳤다고 하는데[止], 비추어 살핌이 되지 아니하면, 돌리는 일[回]은 하고 있으나 빛[光]이 없다고 말하고, 비추어 살피는 일[觀]은 하고 있으나 헛된 생각이 그쳐지지[止] 아니하였으면, 빛[光]은 있으나 돌리는 일[回]은 없다고 말한다. 잘 알아두기 바란다
 
 
제 4장 회광조식 (回光調息)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우고 익힘에 있어서 가장 으뜸이며 핵심이 되는 내용은, 다만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한 순수한 마음만으로 실천하여 나가는 것일 뿐이다. 여러가지 효험이 일어나지만 그것은 얻으려고 하지 아니하여도 저절로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크게 몽뚱그려서 볼 때, 처음 배우고 익히는 경우에 잘못을 저지르기 쉬운 것은,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려서 정신이 없게 되는 것[昏沈]과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散亂], 두 가지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잘못을 물리치고 나면, 하늘의 비밀을 열어 볼 수 있는 어떠한 구멍[竅]이 생기게 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마음[心]을 숨[息]에 함께 붙어 있도록 하는 수밖에는 없다. 숨[息]이라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이며, 스스로의 마음은 숨[息]이 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한번 움직이면 곧 기氣가 생기게 되는데, 그 이유인즉, 기氣라는 것은 본래 마음이 변화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사람의 생각은 그 움직임이 지극히 빨라서, 눈깜짝할 사이에 하나의 헛된 생각[妄念]이 생겼다가 사라지는데, 그러는 과정에 한 번의 호흡呼吸이 그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속에서 일어나는 호흡[內呼吸]과 밖에서 일어나는 호흡[外呼吸]은 마치 사람의 목소리와 메아리가 서로 따르는 것과 같다. 결국, 하루에 몇만 번의 숨[息]을 쉬니, 그 자체로써 몇만 번의 헛된 생각[妄念]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흘러서, 내면 세계의 밝음을 유지하는 정신[神明]이 다 새어나가 버리면, 마치 나무가 죽어서 마르는 것과 같고, 불 꺼진 재가 싸느랗게 식는 것과 같아진다. 그렇다고 생각[念]이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생각[念]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숨[息]이 없어지기를 바라겠는가?
숨[息]도 없앨 수는 없는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결국, 그러한 병病을 일으키는 얼개 자체가 바로 약藥으로 될 수 있음을 알아서 그렇게 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다름아니라, 마음과 숨이 서로 붙어서 의존하는 일[心息相依]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빛을 돌리는 일[回光]은 반드시 숨을 고르는 일[調息]과 함께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데, 그 방법은 처음부터 끝가지 귀의 빛[耳光]이라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빛을 이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눈의 빛[目光]이라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귀의 빛[耳光]이라는 방법이다.
눈의 빛[目光]이라는 것은 바깥에 접해 있는 해[日]와 달[月]이 그 빛을 서로 어우르는 것이고, 귀의 빛[耳光]이라는 것은 속에 있는 해[日]와 달[月]이 그 정精을 서로 어우르는 것이다.
 
 
그런데 정精이라는 것을 다시 말하면 빛[光]이 엉겨서 한곳에 머물러 있는 장소이고, 같은 뜻인데 이름만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귀로는 잘 듣고[聰] 눈으로는 잘 보는[明] 것을 통틀어서, 그 모두가 하나의 신령한 빛에 지나지 아니한다.
배우고 익힘에 들어 자세를 잡고 앉을 때에는 눈을 가늘게 내려 떠서 마치 발을 내린 것과 같은 상태로 되는데, 그런 뒤에는 눈길을 코끝에다 맞추어 놓고 그 상태를 그대로 지켜낼 수 있게 되면, 모든 긴장과 의식을 풀어서 억지스러운 요소들을 모두 내려놓는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일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마음을 모아서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 숨[息]의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숨의 들고 나는 소리가 귀에 들려서는 아니되는 것이 배우고 익히는 요령이니, 여기에서 숨[息]의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그 소리없는 소리를 듣는 것을 가리킨다. 한번 소리가 나게 되면, 그 숨은 거칠고 들떠 있는 것이라서 가늘어질 수가 없다.
 
 
그러니 마음을 잘 참아내면서, 숨을 가볍고 가벼우며 알듯 모를 듯하게 하여,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억지스러움을 다 내려놓고 더욱더욱 숨이 없는 듯한 상태로 되며, 숨이 없는 듯한 상태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깊어지고 더욱더욱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한 상태로 되어야 한다.
그와 같이 오래도록 지켜 나가노라면, 그 숨이 없는 듯한 상태조차도 갑자기 뚝 끊어진다. 이것이 곧 태어나기 이전 상태에서의 참된 숨[眞息]이라는 것이 눈앞에 이루어진 것이다. 마음과 몸이 그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무릇 마음이 가늘게 되면 숨도 가늘어지니, 마음이 하나로 되면 기氣를 움직이고, 숨이 가늘게 되면 마음도 가늘어지니, 기氣가 하나로 되면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마음을 흩어짐 없이 한곳에 머물게[定心] 하려면, 반드시 그보다 먼저 기氣를 길러야[養氣] 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역시 마음을 가지고는 처음으로 손을 대서 시작할[入手] 곳이 없으므로, 기氣로 말미암아서 그 실마리를 삼는 것이다. 이른바 잡된 것 없이 순수한 기[純氣]를 지켜낸다는 것이다.
 
 
그대들은 '움직인다'[動]는 용어의 뜻을 밝게 알지 못하고 있는데, 움직인다[動]는 것은 끈으로 묶어 당겨서 움직이게 한다는 말이니, 결국 '끌어당긴다'는 용어의 별명別名에 해당한다.
바쁘게 달림으로써 그것을 '움직이게'[動] 할 수 있다면,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여 순수하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읨[靜]으로써 그것을 '편안하게'[寧] 할 수 없을 이유가 없다. 이것이 바로 큰 성인聖人들께서 마음과 기氣의 어울림을 살펴 가지고 그때그때 알맞게 사람을 가르치는 방법을 잘 세워서 뒷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푼 곳이 된다.
 
 
단丹에 관한 책에서 "닭은 알을 품고서 마음으로 변함없이 알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닭이 알을 깔 수 있는 까닭은 따뜻한 기운[暖氣] 때문이다. 따뜻한 기운은 다만 알 껍질만을 따뜻하게 함에 그치고, 그 알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는데, 닭이 마음으로 그 기운을 이끌어서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속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는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한결같이 마음을 그곳에 쏟아 붓는다. 마음이 그 속으로 들어가면 기氣도 들어가게 되고, 따뜻한 기운을 얻어서 알이 깨어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암탉이 가끔씩 둥지 밖으로 나가는 경우가 있더라도 변함없이 알 속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서, 그 신神을 쏟아 붓는 바에는 조금도 틈이 생기지 아니하게 한다. 신神을 쏟아 붓는 바에 조금도 틈이 없게 하니, 따뜻한 기운도 역시 밤이나 낮이나 틈이 없게 된다. 신神이 살아 있는 것이다.
 
 
신神이 살아나기 위하여는 먼저 그 마음이 죽어 버려야 한다. 사람이 마음을 죽여 버릴 수 있으면, 그 자리에서 그 사람 전체를 주재主宰하는 가장 으뜸된 신[元神]이 살아난다.
그런데 마음을 죽여 버린다는 것은 나무가 말라 죽듯 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을 오로지 하나로 모아서[專一] 나누어지지 아니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께서는 "마음을 한곳에 놓아 두고, 무엇이든 일삼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말라"[置心一虛, 無事不辨]고 말하였다.
 
 
마음은 달아나기를 잘하므로 기氣로써 그것을 잡된 것이 섞이지 않고 순수하게 되도록 하며, 기氣는 거칠어지기를 잘하므로 마음으로써 그것을 가늘어지게 한다. 이와 같이 하면, 어찌 흩어짐이 없이 한곳에 머무르지[定] 아니하는 일이 있겠는가?
크게 묶어서 말하면,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려서 정신이 없게 되는 것[昏沈]과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는 것[散亂]이라는 두 가지 잘못이 있는데, 그 두 가지 잘못은 오직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하는 일[靜功]에 의하여서만 고쳐진다.
 
 
하루하루 끊어짐없이 그 조용히 하는 일을 배우고 닦아 나가노라면 저절로 크게 쉴 곳이 있게 된다. 만약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앉아 있는 일을 배우지 않는 경우라면, 비록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흩어지더라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한게 된다.
일단 마음이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그 알아차렸다는 자체가 그와 같이 마음이 흩어짐을 막는 기틀이 되는 것이다.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있어도 스스로도 그러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어두움 속으로 빠져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그러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과는, 그 차이가 너무나 커서 서로 천리 만리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이 진짜 빠져 있는 것이고, 그러함을 알아차리고 있는 것은 어두움 속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맑고 밝음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 걷잡을 수 없이 마음이 흩어지는 것은 신(神)이 이리저리 달려가기 때문이고,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있는 것은 신(神)이 아직 맑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잘못은 좀 쉽게 고칠 수 있지만,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잘못은 치료하기가 어렵다.
병에 비유해 보면, 아프거나 가려운 것은 약으로 치료할 수가 있으나, 정신을 잃어버리는 것은 몸의 어느 부분 또는 팔다리의 감각이 없어지는 마비 증세와 같은 것이어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흩어지는 것은 거두어들일 수가 있고,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어지러운 것도 가지런하게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만약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서 정신을 잃어버리면, 멍청하고 또 멍청하여 깜깜하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흩어지더라도, 그 흩어지고 어지러운 장소는 아직 있기 마련인데,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면, 오로지 넋[魄]만이 모든 것을 좌우하게 된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흩어지는 경우에는 아직도 얼[魂]이 남아 있는데, 어두움 속으로 깊이 빠져 버리면 완전히 음陰만이 주장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앉아서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어서 조용함을 배우며 익히려고 하는 경우에 잠이 오려고 하는 것이 바로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이다. 어두움 속으로 빠지지 않도록 잠을 끊어 버리는 방법은 오직 호흡을 고르는 일[調息]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호흡[息]은 입과 코로 나가고 들어오는 호흡을 말한다. 비록 태어나기 이전부터 쉬고 있던 상태와 같은 참다운 숨[眞息]은 아니지만, 그 참다운 숨이라는 것도 역시 이 입과 코로 쉬는 호흡에 붙어 있는 것이다.
 
 
마음과 기氣를 닦는 일을 배우고 익히는 경우에는 언제나 반드시 마음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하여야 하며, 기氣를 잡된 것이 섞이지 아니하고 순수하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마음의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할[靜] 수 있는가?
그렇게 할 수 있는 작용이 호흡 속에 들어있다. 호흡이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오직 마음으로만 스스로 알고 있어야 되지, 귀에 그 소리가 들려서는 아니된다. 귀에 그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면 가늘어지고[細], 가늘어지면 맑아지는데[淸],
 
 
거꾸로 소리가 들리면 기氣가 거칠어지고[粗], 거칠어지면 흐려지고[濁], 흐려지면 곧 저절로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어가서[昏沈] 잠이 오게 마련이다. 비록 그와 같이 마음의 작용이 호흡 속에 들어 있기는 하지만, 그 작용을 올바른 쪽으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서는 아주 훌륭하게 그 작용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진리가 그러하듯이, 이 마음의 작용이라는 것도 결국 작용하지 아니하는 작용이다. 오직 알듯 모를 듯하게[微微] 빛으로 비추고[照] 마음으로 들어야만[聽] 할 뿐이다.
 
 
"알듯 모를 듯하게 빛으로 비추고[照] 마음으로 듣는다[聽]"는 이 구절에는 숨겨진 뜻이 들어 있다. 어떻게 하는 것을 두고 빛으로 비춘다[照]고 말하는가?
눈의 빛[眼光]이 스스로를 비추는 것이니, 눈은 오직 안으로만 보고[內視] 바깥을 보지[外視] 아니한다. 바깥을 보지 아니하면서도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는 것이 곧 안으로만 보는 것[內視]이 되고, 실제로 몸 속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겠는가? 귀의 빛[耳光]으로 스스로를 듣는 것이니, 귀는 오직 안으로만 듣고[內聽] 바깥을 듣지[外聽] 아니한다. 바깥을 듣지 아니하는데도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으면 곧 안으로만 듣는 것[內聽]이 되고, 실제로 몸 속에서 나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 아니다.
듣는다[聽]는 것은 그 소리없는 소리를 듣는 것이고, 본다[視]는 것은 그 모양없는 모양을 보는 것이다.
 
 
눈으로는 바깥을 보지 아니하고, 귀로는 바깥을 듣지 아니하면, 기氣가 닫혀 막혀서 안으로 달려들어가려고 한다. 오직 안으로만 보고[內視] 안으로만 들어야[內聽] 기氣가 바깥으로 달려가지도 아니하고 안으로 달려가지도 아니하게 되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아니하고 마땅함[中]을 얻어서 어두움에 빠져 들어가지 아니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를 두고 '해와 달이 정精을 어우르고 빛을 어우름'[日月交精交光]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두움에 빠져 들어서 잠이 오려고 하거든, 즉시 일어나서 천천히 걷다가 정신이 맑아진 뒤에 다시 앉아서, 배우고 익힘에 들라.
 
 
맑은 새벽의 한가한 틈이 있을 때에 향 한 자루가 타도록 앉아서 배우고 익히는 것이 참 좋다. 오후가 되면, 세상살이의 일들이 아주 어지러워져서 쉽게 어두움으로 빠져 들게 된다. 그러나 오후에는 배우고 익히는 일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며, 또한 그 앉아 있는 시간도 꼭 향 한 자루가 다 타도록 계속할 필요는 없다.
오직 모든 연분[緣]을 내려놓아 버리고,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히 잠시 앉아 있곤 하여야 할 뿐이다. 그렇게 오랜 나날이 지나노라면 무엇인가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있게 되고, 어두움 속으로 빠져 들지 않게 된다.
 
 
제 5장 회광차류 (回光差謬)
 
 
여조(呂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우고 익히는 사람들의 경지에 차츰차츰 잡된 것이 없어지고, 속속들이 익어가게 되면, 겉보기에 마치 마른 나무나 바위같이 앉아만 있을지라도, 그 나아가는 앞에는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질 일들이 많이 놓여 있으므로, 참으로 자세하고 자세하게 알려주어야만 한다.
이 가운데의 소식은 직접 몸으로 그 경지에 이르게 되면 알 수 있게 될 것이나, 그 가운데 몇 가지는 내가 지금 규칙을 세워서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과 선학禪學과는 같지 아니하여서,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에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나타나는 효험이 있다. 먼저 우리가 따르는 가르침과 선학禪學과의 차별이 되는 곳을 말하고, 그런 뒤에 다시 그 나타나는 효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좋겠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가르침의 종요로운 뜻을 밟아 나가려고 할 때에는, 먼저 그 경우경우에 맞는 방법들을 마련해 두어야 하고, 일을 당하여서 꾀를 쓰거나 알음알이를 내어서 마음을 자꾸만 작용시켜서는 아니된다.
 
 
스승의 가르침들이 더하거나 빠짐이 없이 원래의 모습 그대로 살아서 힘차게 움직일 수 있도록 손을 대지 말라. 기氣는 조화를 이루고 마음은 한 가지 일에 오로지 일치하고 있도록 하라. 그런 뒤에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靜]에 드는 것이다.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 때에는 반드시 하늘이 비밀로 하고 있는 어떤 기틀을 얻어내야 하고, 그 기틀에로 들어갈 수 있는 어떤 구멍[竅]를 얻어내야 한다. 그냥 할 일 없이 마치 거북이가 등껍질 속에 들어가 있듯이 앉아만 있어서는 아니된다.
 
 
이른바 선善이다 악惡이다라고 말할 수 없고 아무 곳에도 빌붙을 바 없는 텅 빔[無記空]이라는 것이다. 모든 인연을 내려놓은 상태에서 말똥말똥 깨어 있으면서 저절로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어떤 뜻[意]를 일으켜서 어떤 현상이나 일을 맡고자 하여서는 아니된다. 무릇 참다운 것만을 지나치게 인정하게 되면 이러한 결과로 되는데, 그렇다고 참다운 것만을 인정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참다운 소식[眞消息]은 그것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若存若亡] 사이에 있는 것이어서, 뜻[意]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여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말똥말똥하게 깨어 있어서 어두움에 빠지지 아니한 가운데, 모든 인연을 내려놓고 저절로 일어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인연 따라 생겨나는 헛된 세계[蘊界]에 떨어져서도 안 된다. 이른바 인연 따라 생겨나는 헛된 세계라는 것은, 다섯 가지 음陰한 마魔가 맡아서 좌지우지하는 세계이다.
 
 
만약 보통사람이 마음의 흩어짐없이 한곳에 머무는 상태[定]에 들 때에, 마른 나무 등결 같고 불꺼진 재와 같은 뜻이 많고, 큰 누리에 따뜻한 봄이 오는 듯한 뜻은 작은 상태로 되면, 음陰의 세계로 떨어지게 되니, 그 기氣는 차갑고, 그 숨[息]은 무거우며, 또한 여러가지 춥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경치와 모습들이 나타나게 되고, 그러한 상태대로 오래도록 나가게 되면, 나무나 돌과 같은 상태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인연도 따라가서는 아니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변화와 움직임을 여의고 조용함에 들게 되면, 명주실 타래를 헝클어 놓은 듯이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많은 일들이 문득문득 찾아오는데, 그것을 쳐 없애려고 하여도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도리어 그것을 따라서 그 속에 빠져 버리면 오히려 흐름을 탄 듯이 편안하게 느껴지게 된다.
이러한 것을 두고, 주인이 노예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상태로 오래도록 나아가면, 욕심이 들끓거나 아니면 물질로 이루어진 헛된 세계[色慾界]에 떨어지게 된다.
 
 
잘되어서 위로 간 사람이라야 신神들이 사는 여러 하늘나라에 태어나고, 잘못되어서 아래로 떨어진 사람은 이리 같은 짐승이나 남의 노예로 태어난다.
천년 먹은 여우[狐仙] 같은 것이 이것인데, 그것은 이름난 산속에서 스스로 그 공기와 달빛과 꽃과 열매를 남모르는 나무와 풀의 정기精氣를 받아 이용하면서, 삼백 년 또는 오백 년, 많으면 몇천 살까지도 지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 쌓았던 노력에 대한 보답[報]이 다하고 나면, 다시금 그 쌓은 공덕에 따라서 여러가지 유한한 세계[趣] 가운데에 태어나게 된다.
 
 
위와 같은 여러가지는 모두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는 길이다. 옆길로 빠지거나 벼랑으로 떨어지는 길임을 이제 알게 되었으면, 우리가 배우고 익히는 가르침에 따르는 경우에 일어나는 효험들을 찾아보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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