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석가모니의 생애와 사상

2022. 10. 25. 09:56수진실/수련정보

불교 출현의 역사적 배경 (네이버 펌글)

불교가 출현한 때인 BC 6세기경에는 당시 인도의 기성종교였던 브라만교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BC 1500년경부터 인도 서북부를 침공하여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아리아인들은 4성 계급(vara) 제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구축했다.

브라만교는 4계급 가운데서 가장 신성한 사제계급인 브라만(Brhmaa)들에 의해 형성된 종교·윤리·문화 전통으로서, 베다라는 성전에 근거한 다신(多神) 신앙을 지닌 종교였다. 여기서는 신과 조상들에게 드리는 제사의례를 중요시했으며 4계급이 각각 지켜야 할 의무를 강조했다.

브라만교는 주로 인도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BC 6~7세기에는 갠지스 강의 중류와 하류를 따라 인구이동이 생기면서 북인도의 중부와 동부로 퍼져가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지역에는 풍부한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하여 도시가 생겨나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종래의 부족국가 대신 코살라와 마가다 같은 강력한 군주국가들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브라만들의 종교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었으며 도시의 세속적 분위기는 보다 합리적인 형태의 새로운 종교를 요구하게 되었다. 종래의 번잡한 제사의례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제사행위의 대가로서 사후에 천상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는 관념에도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베다의 마지막 부분인 〈우파니샤드 Upanishad〉 사상에도 이미 나타났다. 인간은 '유한한 행위'(業 karma)로서는 도저히 영원한 세계를 얻을 수 없고 끊임없이 윤회(sasra)의 세계에서 생과 사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자각과 더불어 인간의 참자아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아는 신비적 지식(jñna)을 통한 해탈이 강조되었다.

그런가 하면 브라만교의 울타리를 벗어나서 베다나 브라만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제사행위와 내세를 거부하는 자유사상과 새로운 종교운동들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사문(沙門 ramaa)이라 불렸는데 그들은 출가자(出家者)들로서 걸식생활을 하면서 숲속에서 고행과 명상을 통해 인생문제에 대하여 다양한 해결방식을 제시했다.

주위에는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추종자들이 모여들어 그로써 하나의 출가 공동체(sagha)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는 철저한 유물론자·숙명론자·도덕부정론자들도 있었으며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니간타 나타푸타와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그들과 같은 사문으로서 인생고의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해탈의 길을 제시했던 것이다.

석가모니의 생애

석가모니의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達多 Siddhrtha)로서 고타마는 그의 성씨였다. 석가(釋迦 kya)족 출신의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kyamuni) 혹은 간단히 석존(釋尊)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족은 지금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카필라바스투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BC 560년경(460년경으로 보는 설도 있음)에 이 왕국의 정반왕(淨飯王 uddhodana)과 마야 부인(摩耶夫人 Mahmy)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까지 두었으나 인생고의 문제를 깊이 자각한 후 29세의 나이에 왕궁을 떠나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유행사문(遊行沙門)으로서 마가다 국에 가서 여러 출가 사문들을 만나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깊은 선정(禪定 dhyna)에 드는 체험을 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해보았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했다.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한 후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에게서 떠났고, 그는 홀로 숲으로 가서 이른바 보리수(菩提樹:나중에 붙인 이름으로 avattha라는 무화과 나무의 일종) 밑에서 깊은 선정에 드는 체험을 하는 중에 깨달음(菩提 bodhi)을 얻어 부처,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석존의 성불체험이었고 불교가 시작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오랫동안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면서 지냈으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法 dharma)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설법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돌이켜 교화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석존은 제일 먼저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고행을 하던 걸식승 다섯 비구를 찾아 그들에게 고행이나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피해 중도를 따라 수행할 것을 말하고 '4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8가지 바른 길'(八正道)에 대한 설법을 하여 그들을 제자로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수도 공동체인 승가(僧伽)의 시작이었다.

석존은 마가다 국에서 교화활동을 하면서 사리불(舍利佛 riputra)·목건련(目連 Maudgalyyana)·가섭(迦葉 kyapa) 등 많은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수달다(須達多 Sudatta)와 같은 부유한 상인들도 있었고,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Bimbisra)도 있었는데, 빔비사라는 석존이 머물 수 있도록 죽원(竹園)을 보시(布施)하기도 했다.

한편 석존은 고향인 카필라바스투를 방문하여 부모와 재회하고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으며, 그의 종형제 데바닷타(提婆達多 Devadatta)와 아난다(阿難陀 nanda)도 그의 출가 제자로 받아들였다.

또한 석가모니의 이모인 마하프라자파티 고타미(Mahprjpt Gautam)도 수차례의 간청 끝에 출가의 허락을 받아 첫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그후 많은 여자들이 출가하여 비구니 승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석존은 35세 때 성도(成道)한 후 입적하기까지 45년 동안 주로 마가다 국과 코살라 국을 중심으로 중인도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포교활동을 했다. 80세에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에 병을 얻어 반열반(般涅槃), 즉 육신을 떠난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

죽음을 앞두고 석존은 승가의 앞날을 염려하여 많은 유언을 남겼다. 석존은 자신이 죽은 뒤 사람들에게 그들 스스로와 법(dharma)을 의지하여 수행할 것을 가르쳤으며 자신이 남긴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할 것을 권했다.

〈대반열반경 大般涅槃經 Mah- parinibbna-sutta〉에 의하면 석존의 사후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유골(遺骨 arra)은 중인도의 8부족들에 의해 분배되어 각기 사리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것은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어느 정도 사실로 입증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교설

석존의 교설은 그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첫 설법 내용인 사성제와 팔정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석존의 교설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석존은 첫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고에 관한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색(色 rpa)·수(受 vedan)·상(想 sajñ)·행(行 saskra)·식(識 vijñna)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설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 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常 anitya)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석존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五蘊)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의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한다.

석존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인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antman)고 한다.

고·무상·무아는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로서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이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갈애(渴愛)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집착(取)을 일으켜 행위(業)를 하여 그 결과(業報)로써 사후에 또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같은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갈애 또한 원인을 갖고 있다. 갈애는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無明)와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석존은 이와 같이 고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集起)들을 분석적으로 설했으며 이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 불렀다. 무지와 갈애로 인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 세를 통해 끊임없는 생사(生死)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3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이러한 고가 멸한 상태, 즉 무지와 갈애가 멸한 상태에 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했다. 이는 고가 멸한 상태(nirodha)가 있다는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탐욕(貪)·성냄(瞋)·무지(痴 moha)의 3독(三毒)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열반은 과거세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석존이 성도했을 때처럼)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

후자를 반열반(般涅槃 parinirva)이라고 부른다. 석존의 입적시에 실현된 경지이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존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현세에서 열반을 실현한 여래(如來 Tathgata)가 사후에 존재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으며 석존은 이에 대하여 가부를 논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그가 대답을 거부한(無記) 것으로 전해지는 14가지 사변적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석존은 열반이라는 초월적 실재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4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또는 줄여서 도제(道諦)를 설했다. 즉 고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 팔정도에 관한 설법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 된다.

도덕적 행위와 삶(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석존은 팔정도를 설함과 아울러 쾌락을 탐하는 삶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의 양극을 피해 중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가르쳤다. 중도는 8가지 수행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태도인 것이다.

석존은 이같은 고락의 중도 외에 단상(斷常)의 중도, 혹은 유무(有無)의 중도도 가르쳤다. 즉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도 석존은 거부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업보도 내세도 없다는 단멸론(斷滅論)도 거부했다.

그러나 존재의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서 존속한다. 열반이란 이렇게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하고 괴로운 인간존재 자체가 완전히 극복된 무조건적인 세계이며, 팔정도는 무지와 탐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을 극복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다.